오늘은 [고흐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면 : AI가 생성한 ‘새로운’ 고흐 화풍]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인공지능, 고흐를 다시 그리다: 기술이 창조한 ‘모사 아닌 창작’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까마귀가 나는 밀밭"...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강렬한 붓질과 색채로 인류의 감정과 자연을 그려냈다. 그런데 이제는 고흐가 죽은 지 1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고흐의 새로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그가 살아 있다면 그렸을 법한 ‘신작’ 말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바로 딥러닝(Deep Learning) 기반의 AI 기술이 있다. 2016년부터 AI 연구자들과 예술가들이 협력해 만든 여러 프로젝트에서는 고흐의 작품 수백 점을 학습시켜 고유한 스타일을 분석한 후, AI가 새로운 이미지에 이를 ‘적용’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장면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대표적인 예로 ‘DeepArt’, ‘NeuralStyle’, ‘Vincent AI’ 같은 플랫폼이 있다. 이들은 고흐의 붓터치, 색 배합, 선의 흐름, 형태의 왜곡 등을 데이터화해 새로운 그림을 생성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시 풍경이나 인물 사진을 입력하면 AI는 이를 고흐의 화풍으로 재해석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단순한 필터링 수준을 넘어, 그림의 감정과 구성 방식까지 ‘창조적으로’ 모사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2018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ING은행, 델프트 공과대학이 공동으로 ‘The Next Rembrandt’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처럼, 고흐에 대해서도 그가 죽기 전 남긴 스케치를 기반으로 미완성 유화의 ‘완성본’을 생성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던 풍경을 그의 화풍으로 그려내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AI 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고흐가 살아 있었다면 그렸을지도 모를 상상’을 시각화해낸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그림은 고흐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고흐를 모방한 기계의 산물일 뿐인가?
예술인가 알고리즘인가: AI 고흐 화풍의 미학적 가치는?
AI가 고흐의 화풍을 모방해 만든 그림이 ‘아름답다’는 데 이견은 적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예술인가, 그리고 진정한 창작인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전통적인 미학에서는 예술을 인간의 의도와 감정, 철학의 표현으로 본다. 고흐의 그림이 강렬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색채와 구도가 아닌, 그의 고통, 광기, 고독, 생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런 맥락이나 내면을 갖지 못한다. 아무리 정교하게 고흐를 학습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패턴’을 분석하고 재조합한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렇게 반론한다. 예술은 ‘감동을 주는가’로 평가되어야지, 그것이 인간의 손으로 그려졌는지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 아니냐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AI 고흐 그림을 보며 진짜 고흐 작품과 유사한 감정이나 미적 경외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AI가 창조한 이 그림 역시 ‘예술’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AI가 진짜 고흐보다 ‘더 고흐답게’ 그릴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고흐는 생전에 실험적이었고, 화풍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AI는 고흐의 수십 년간의 스타일을 압축하고 정제하여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전형적인’ 고흐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이는 예술의 본질이 창조인지, 재현인지, 혹은 수용자의 감동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결국 AI로 만든 고흐 스타일 그림은 예술의 정의를 다시 묻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을 넘어 우리 사회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윤리와 권리의 경계: 죽은 예술가의 유산은 누구의 것인가?
AI가 고흐의 화풍을 재현하고 ‘신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윤리적·법적 문제를 동반한다.
첫째로, 고흐는 이미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AI가 20세기 후반 혹은 최근에 사망한 예술가들의 스타일을 학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프리다 칼로, 장 미셸 바스키아,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의 화풍은 아직 유족이나 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이들의 유산을 AI가 무단으로 활용한다면, 이는 저작권 침해 혹은 윤리적 도용에 해당할 수 있다.
둘째로, 사망한 예술가가 자신이 사후에 AI로 ‘부활’하는 것에 동의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사후 이미지 권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예술가가 생전에 밝힌 가치관이나 창작 철학에 반하는 방식으로 AI가 그림을 만든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고인의 정체성에 대한 침해로 간주될 수도 있다.
셋째로, AI가 만든 ‘고흐풍’ 그림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상업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한 스타트업이 AI로 만든 고흐 스타일 그림을 NFT로 발행하고 수익을 얻었다면, 이 창작물의 법적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AI에게? 그것을 만든 개발자에게? 혹은 고흐의 이름을 쓴 이상, 어떤 사회적 환원 의무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이슈는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이다. AI의 능력이 더 발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죽은 예술가들을 ‘디지털 유령’으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기술의 진보를 단순히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을까?’라는 질문을 함께 가져야 한다.
AI 시대, 예술의 의미는 어디로 가는가
고흐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니, 그의 이름 아래, AI가 새로운 고흐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그 이미지 속에서 익숙한 붓질과 색을 보고 감동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감정인가, 아니면 기술이 대체할 수 있는 ‘패턴의 조합’인가?
AI 고흐는 단지 예술의 재현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그림 이상을 묻는다. 기술이 점점 더 창조의 영역을 넘볼 때, 인간은 어떤 감정과 책임으로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는가?